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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요 신경균 도예가, 일본 ‘문화재급’ 이도다완 국내 첫 공개
장안요 신경균 도예가, 일본 ‘문화재급’ 이도다완 국내 첫 공개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8.05.14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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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발로서 일본 국보 26호가 된 이도다완(井戶茶碗) ‘기자에몬이도’(喜在衛文井戶). 이처럼 희귀한 이도다완을 보관해오던 장안요 신경균 도예가가 실물을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일본의 한 다이묘(성주)가 쓰던 이도다완을 갖고 있던 소장가로부터 3년 전 인수한 이도다완을 최근 Queen에 단독 공개한 것이다. 약 600년 전 경상도 진해시 웅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사발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취재 백준상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신경균 도예가

1500년대 일본 다이묘가 쓰던 찻사발 공개
“일본이 최고로 인정하는 한국의 그릇, 예술품이자 생활의 집기로서 최고의 빛을 발하는 이도다완(이도 산주로라는 사람이 조선에서 가져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사발 총칭)이 대한민국에도 있어야 한다는 자존심으로 매우 힘들여 구한 것입니다. 이런 최고의 작품을 잠깐이나마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우리의 대단한 도자문화 역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작품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신경균 작가는 도예가이자 도자기 수집가, 가구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도다완을 재현한 사기장 신정희 선생의 아들로서 부산 기장에 있는 장안요에서 장작가마를 이용해 자기를 직접 만들뿐 아니라 대학과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도자기를 연구하고 필요하면 도자기를 사 모아 이도다완 등 자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권위자이다. 특히 이도다완을 배출한 웅천가마에 대한 대학원 논문을 쓴 바 있다(1992년).
신경균 작가에 따르면 일본에는 약 200점, 한국에는 3점 가량의 이도다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에 있는 이도다완 중에는 국보 기자에몬 외에도 3점이 1급 국보급, 20여 점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국보인 기자에몬의 추정가가 현재 1,000억 원 이상, 국보급은 200억 원쯤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공개된 이도다완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고려다완, 김해사발, 조선막사발 등으로도 불리는 이도다완은 1500년대 경남의 민요(民窯)에서 한 세대 정도 생산되던 분청사기의 일종이다. 분청사기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백자보다 급이 떨어져 일반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자기였다. 현재로서는 용도가 분명하지 않고, 얼핏 서민들의 막사발로 보이는 이도다완은 당시 일본에 의해 주문 제작되거나 수출되어 찻사발로 활용됨으로써 반전의 계기를 맞는다.
16~17세기 서 일본 지역에서는 당나라에서 유래된 말차(抹茶-찻잎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사용)를 마시는 다도가 유행했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다도를 관장하던 센 리큐(千利休)에 의해 이도다완은 최고의 찻사발로 자리 하게 된다.
승려인 센 리큐는 불교 선종 사상의 영향으로 그전까지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차 문화의 대안으로 와비차(わび茶)라는 차 문화를 육성했는데, 그는 자연적이고 소박하면서도 차의 깊이와 정신을 일깨워주는 이도다완을 ‘천하제일’의 찻사발로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찻사발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격이 상상할 정도로 높아져 임진왜란 10년 전에는 이도다완 한 점에 쌀 1만~5만석 정도였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무사들 중에는 목숨을 내놓더라도 조선의 찻사발 하나만 소장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것이 임진왜란의 보이지 않는 발발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 부르며,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근대 도자기 혁명을 이끌고 일본의 근대화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밥그릇 크기 정도의 조그만 조선의 막사발이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북아의 역사를 좌지우지한 사례인 것이다.
이러한 이도다완은 일본과 한국의 도공들에 의해 재현이 시도되지만 아직까지 이도다완을 넘어선 것은 나오지 못 했다는 평가다. 신경균 작가의 부친인 고 신정희 도예가는 이도다완을 재현하여, 지난 1978년 일본명사명류록에 최초로 등재되는 한국인이 되었다.

한·중·일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는 진정한 명품
이도다완을 공개하는 자리에는 다소의 긴장감이 흘렀다. 신경균 작가는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언론에 공개한다는 마음에, 취재진은 혹시 취재나 촬영 도중에 실수로 다완을 깨트릴까 걱정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도다완은 일본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임을 알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개의 다이묘 박스와 비단에 둘러싸여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먼저 붉은 색 계통의 인도 카시성 비단이 이도다완 전체 박스를 감싸고 있었다.
비단을 펼치니 겉 박스에 ‘이도’(いと)라고 발음되는 ‘井戶’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한자와 히라가나는 희미하고 정자체가 아니어서 기자로서는 무슨 글자인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웠다. 신 작가는 임진왜란 전 일본 글 양식에 따른 글자라 했다.
박스를 여니 안에 다시 교토 비단에 감싸인 물건이 나왔다. 비단은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바랜 느낌이었다. 비단을 여민 끈을 푸니 다시 조그만 다이묘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박스 자체도 예술품이라 할 정도로 매우 가볍고 상자가 스스로 부드럽게 닫혔다. 박스에는 단출하게 ‘井戶’라는 글자만 적혀 있었다.
박스를 여니 이번에는 네 귀퉁이에 솜을 채운 모시 기둥이 있고 가운데에 그릇 모양대로 만든 비단주머니가 나왔다. 비단주머니를 열고 그릇 안 완충재인 목화솜 뭉치를 꺼내니 비로소 이도다완이 모습을 보였다.
“보따리를 풀고 또 푸니 그 안에 한국이 있더라!”라는 말로 신 작가는 이도자완을 개봉한 감회를 요약했다. 나신을 보여준 그릇은 바로 세상을 움직인 그릇, 이도다완이었다. 그 안에 파란만장한 한·중·일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도다완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날 공개된 이도다완은 황토색보다는 비파색을 띠는 다완이었다. 그릇은 원형이 아니라 비뚜름한 선으로 연결된 타원형의 모습을 띠었다. 완벽한 자태는 아니어서 금 간 곳을 군데군데 금으로 정교하게 이어 붙였다.
하지만 그릇의 아름다움이나 기능은 손상되지 않았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그릇을 보수하는데 황금을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 작가는 문득 “금덩어리보다 백배 낫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마음이 있으면 저렇게 못 만든다”고 했다. 도공으로서 세상에 대한 마음을 비워야, 무심(無心)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라는 걸 직관한 것이다.
그릇은 맨질맨질 부드럽고 맨 안쪽에는 포개 구운 흔적이 까칠하니 남아 있었다. 균열은 사각형이 아니라 오각형이었고 물을 붙자 균열의 경계선이 짙어져 꽃이 피듯 살아났다. 이도다완에 말차를 만들어 마셔보았다. 이도다완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차를 잘 섞이게 하고 쓴맛을 줄여 준다고 한다. 신 작가는 “여느 잔에 마시는 것과 다르다. 하얀 거품이 인 푸른 말차에서 작은 우주를 본다”고 말했다. 차를 마시고 다완을 닦으니 반질반질 다시 윤기가 돌았다.

 

“문화는 옛것을 알고 계속 진화해 나가야”
일본 사람들은 조선사발의 가치를 모르고 막사발로 썼다며 조선 사람들 참 무식하다는 식의 얘기를 하곤 한다. 자신들은 그 가치를 발견해 국보로 만들었다며 우쭐해 한다. 그 말이 맞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문화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다.
일본 태양출판사에서 펴낸 <101인의 고미술>이란 책에 언급된 미술품의 98%가 조선 물건이었다고 한다. 일본 정치인과 우익 인사들이 한국을 비난해도 조선 미술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 우수함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다.
신경균 작가는 반문했다. “일본 사람들이 다 미쳤는가? (조선 사람이 개밥그릇으로 쓰는 그릇을 국보로 만들 게…)” 그리고는 스스로 답했다. “옛것을 모르면 답이 없다.”
그는 잘못된 사회인식과 정책으로 인해 현재 한국 문화가 정체에 빠져있음을 상기시켰다. 문화를 만들어 나갈 힘이 없고, 그래서 정교한 문화를 못 만든다고 지적했다. 문화를 발전시키려면 문화를 자꾸 쪼개야 하고 다름을 인정해야 하며 돈도 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통에 안주하는 것도 경계했다.
“과거에 문화가 좋았다고 문화를 과거에 묶어두면 안 됩니다. 이도다완이 좋았다고 해서 도자문화를 조선시대에 묶어 놓아서야 되겠습니까. 문화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문화는 전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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